인간/비인간을 넘어,
행성적 관점의 인프라 고찰
인간중심적 인프라에서 탈인간중심적 인프라로
이 책은 인간이 환경으로서의 지구 자체를 인프라로 전유해 온 과정을 인류세를 둘러싼 담론들을 중심으로 탐구하고, 생태계를 능동적 행위자로 사고하는 새로운 담론들을 검토한다. 인프라는 인류세를 초래한 핵심 원인이라는 점에서 인류세의 도래를 알리는 가장 강력한 물질적 증거이다. 인프라 구축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화석연료가 사용되고 자원이 고갈되며, 이는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를 가속했다. 인프라는 인간의 이동과 물질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지구온난화, 생물다양성 손실, 각종 오염 등 지구 시스템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교란을 일으킨다. 동시에 인프라는 인류세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불타는 지구’에 동승한 공동 운명의 절멸 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집합적 생존’의 거시적 방책을 찾으려” 하는 “인류세 관점”은 인프라에 주목하는 ‘인프라로의 전환infrastructural turn’을 강제한다. 인류세가 제기하는 도전이 자연/문화, 인간/비인간 등의 이분법에 기반한 근대적 사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요청한다는 점에서, 인프라로의 전환은 “그보다 넓은 반反 인간중심주의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세의 인프라: 환경, 행성, 디지털 미디어
인프라적 고찰이 결국 부각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환경, 행성과 초실재를 인프라로 사유하는 일은 인간의 중심성을 해체하는 동시에 인간에게 새로운 책임을 부여한다. 그것은 인간중심적 인프라를 탈인간중심적 인프라로 재건하고, 이를 통해 인류세의 다중 위기의 해법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선과 어떤 정의를 추구할 것이냐는 문제,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이냐는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1부 ‘환경과 인프라’는 인류세 담론과 인프라 담론의 교차점에서 환경으로서의 지구를 인프라로서의 행성으로 재사유할 이론적 가능성을 모색한다. 행성 인프라는 자연으로서의 환경과 문화로서의 인프라라는 이분법에 도전할 뿐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 너머에서 확장된 타자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요구한다
2부 ‘행성과 인프라’는 인류세 담론 앞에서 더욱 주목받고 있는 생태학의 관점에서 인프라로서의 행성을 고찰한다. 인간이 초래한 기후위기는 생물이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인 생태학을 해법으로서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을 인간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생태학에는 한계가 있다. 이를 탈피할 때 우리는 인간과 비인간이 동등하게 얽혀 있는 전체로서 행성, 더 나아가서 우주라는 범주를 얻게 된다. 행성과 우주의 눈으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고찰할 때, 우리는 인간중심적 생태학 너머를 상상할 수 있다.
3부 ‘디지털 미디어와 인프라’는 인프라의 외연의 또 다른 확장을 추구한다. 행성과 우주로의 확장이 규모 면에서의 확장이라면, 초실재로의 확장은 실재 너머로의 확장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인간이 활동할 수 있는 가상 세계를 가져다주었다. 여기에서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온라인 쇼핑몰, SNS, 온라인 커뮤니티, 온라인 미디어에서 거리와 특정 정체성에 구애받지 않고 생산과 소비를 하고 있다. 그러한 한에서 가상 세계 역시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 구조, 즉 인프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