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을 중심으로 살펴본 1930년대 세계사적 상황과 에콜 드 파리)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근대미술의 거장들이 인상주의, 상징주의, 입체주의 등 현대 미술의 주요 흐름을 이끌어 내며 세계 미술의 중심지로 떠오른 파리. 프랑스를 거쳐 간 당시의 젊은 한국 청년들이 오늘날 국제적인 거장 원로작가들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프랑스의 영향은 생각보다 지대하다.
1896년 태어나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을 떠난 여성었던 나혜석은 1918년 귀국하여 화가, 작가,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다 1930년 이혼 후 1948년 12월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하기까지 생애 후반의 영락의 시기 내내 ‘자유의’파리를 그리워했으며 실제로 다시 파리로 돌아갈 시도를 구체적으로 하기도 했고, 생의 막바지에는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으러’ 파리로 가겠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대체 나혜석이 만나고 보았던 파리가 어떤 모습이었길래 그녀는 평생 파리를 그리워 했을까?
<에콜 드 파리>, 파리 파(派)라고도 하는 이 용어는 양차 대전 사이에 파리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화가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에콜 드 파리는 제1차 세계대전 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즉 전간기 시기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던 외국인 화가들을 가리킨다. 이들 대부분은 조국을 떠난 외국인이었고, 감상적이고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이들의 그림에 짙게 깔려있는 애수와 표현주의적 경향은 이러한 성향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기도한다. 때문에 파리에서 가난하고 비참하게 생활하면서도 각자의 민족적 자질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특징을 보여준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에 등장하는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젊은 시절 한 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는 행운이 그대에게 따라 준다면, 파리는 ‘움직이는’ 축제(Moveable Feast)처럼 평생 당신 곁에 머물 것이다.”. 과연 나혜석에게 이 축제는 즐겁기만 한 것이었을지 본 강의를 통해 1930년대의 유럽 문화, 식민주의 등에 대한 사고를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다.